옛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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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길 - 탄천 이야기

- 문명의 젖줄, 탄천용인에서 발원하여 성남을 거쳐 한강까지 36.5km를 흐르는 탄천(炭川)은 문명의 젖줄입니다. 우리말로 ‘숯내’ 또는 ‘수내’ , ‘순내’로 발음되며, 물줄기의 위치에 따라 검천, 험천, 머내, 천호천(穿呼川), 작천(鵲川), 마희천(馬戲川=머흐내, 험천) 등의 다른 이름도 있습니다.그리고 탄천의 숯과 관련된 마을 이름으로 성남 태평동 일대에 ‘숯골’이 있는데, 이것을 한자로 탄동, 탄리(炭洞, 炭里)로 표기합니다.바로 이 지역이 광주의 탄벌리 등과 함께 궁궐과 남한산성에서 필요한 숯을 구웠던 지역임을 알 수 있지요. 옛날 궁궐에서는 일상생활과 국왕을 비롯한 중요 인물의 무덤을 만들 때 대량의 숯을 사용했고,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는 전시에 대비하여 소금과 숯을 여러 곳에 묻을 때 숯 24,192섬을 묻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김종직(1431-1492)의 시 <마천에서 바라본 바를 기록하다>에 “숯을 굽느라 골짜기엔 연기가 나네(燒炭谷生煙)”라는 구절이 있고, 숯골(炭洞) 지명은 이달충(?~1385)이 숯골에 새로 집을 짓고 지은 시 <탄동신거(炭洞新居)>에도 보입니다. 최근 판교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었는가 하면, 고구려식과 백제식 무덤, 그리고 숯가마가 발굴되어 탄천 주변으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았고, 이 지역에 숯가마가 있었기에 냇물 이름도 탄천이라 불리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군사훈련과 탄천탄천에는 오늘날보다 많은 물이 흘렀고 이 물을 이용하여 탄천 주변에는 관용 목장이 있었습니다. 이 목장에서는 궁궐에서 필요한 말을 길렀는데, 태종 7년 10월 탄천교가 무너져 말 세 마리가 물에 빠지고, 그 중 한 마리가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고로 다리 공사를 감독했던 광주판관 노상신이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 당했지요. 탄천 주변에 말을 기른 것은 예부터 한강이남 지역이 대규모 강무장(講武場=군사훈련장) 이었기 때문인데,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한 후 한강 일대에서 군대사열을 크게 벌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이왕 7년 7월에는 석천(石川)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했는데 한쌍의 기러기가 날아오르자 임금이 친히 쏘아 떨어뜨렸다.”) 특히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에는 한강 남쪽 일대는 거의 해마다 강무장으로 활용되었는데요, 태종이 상왕을 모시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는가 하면, 이후 세종 임금 등 역대 임금이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탄천과 낙생행궁, 대야원에 유숙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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