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 이야기
퍼가기
카카오톡으로 퍼가기페이스북으로 퍼가기
평해길 제10길(솔치길) - 정미의병 때의 격전지 삼산리

양평군 양동면 삼산리는 정미의병의 본거지 중 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의병을 토벌하려는 일본군과 이곳에 주둔하는 의병들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지요. 1907년 정미년은 고종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 군대해산이 벌어진 해입니다. 이에 분노한 의병들이 전국 각처에서 봉기하였지요. 이중 양동면은 이인영 의병대장이 이끄는 의병진이 주둔했던 곳이었습니다. 양동면은 산악지대가 많은 분지형 지형을 가지고 있어서 구둔치, 벗고개, 모른고개, 송치 등 양동면으로 들어오는 여러 고개에서 적들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지요.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 응전하면서 시간을 지체할 수 있고, 반격과 대피도 손쉬울 뿐 아니라 서울이 가까우면서도 군사적 요새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양동면에는 삼산리, 석곡리, 단석리, 매월리, 석우리 등 전역에 걸쳐 의병진들이 분산되어 주둔하였는데, 5000여 명에 달하였고 이들의 본진은 삼산리였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대토벌 작전을 개시하였고요.

삼산리 전투는 그해 116일부터 8일까지 사흘간 벌어졌습니다. 일본군 토벌대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말을 이용하여 이동이 빨랐고 신식무기로 무장하였는데 반해 의병들은 개인화기는 미약하였지만 수적으로 우세하고 지형지물에 밝아 나름대로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며 용감히 싸웠습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지만 의병진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결국 산속으로 흩어지며 훗날을 도모하게 됩니다. 서울진공작전을 위하여 양주와 원주 등지에 재집결했던 것이지요. 이후 서울진공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삼산리 전투는 이 작전을 계획대로 수행할 수 있게 한 의병항쟁사에서 의의가 큰 전투였음은 분명합니다.

 

       대송치에 세워진 충절의 고장 삼산리 표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