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길 사랑채사랑채는 손님을 접대하며, 묵객들이 모여 담소하거나 취미를 즐기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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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 7길 독산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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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담에 살 때에는 가까운 산을 찾았으나 수원으로 이사온 후 아파트 창문 아래가 서호천 걷기 제4길로 많은 사람들이 활발히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동참하였다. 서호저수지 입구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양과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지방이 이어졌던 1,000리에 달하는 긴 길을 삼남대로라고 불렀다. 이 길을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 걸었다. 경기도에서는 옛노선을 고증하여 역사문화 탐방로 지정하여 시민들이 걷게 하였다'고 쓰여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자주 다니던 소풍길이다. 소풍은 학교에서 자연관찰이나 역사 유적의 견학을 겸하여 야외로 갔다 오는 일이다. 오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농촌지역이라 자연관찰은 염두에도 없었던 것 같다. 역사 유적지를 가야 하는데 인근에는 없었다. 거의 매년 독산성으로 소풍을 갔다. 초등학생으로서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몇 개 산을 넘고 가파른 산기슭을 기어올라야 했다. 당시에는 원족이라 불렀다. 어린나이에 왜 이리 멀은지 불평하는 친구가 많았다. 산을 기어오르려면 땀을 많이 흘려야 했다.

 

독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일화로 유명하다.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에서 진을 치고 대치하게 되었다. 왜장은 물 한 바가지를 산 위로 위로 보내 조롱하였다. 권율장군은 의도를 알아차리고 백마를 정상에 세우고, 말에 힌 쌀을 부어 말을 씻는 시늉을 하였다. 이것을 본 왜군은 성내에 물이 많아 항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퇴각하였다. 그 후 이곳을 세마대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동창모임이 있다. 몇 년 전에 옛 소풍 추억도 되새길 겸 세마대로 가기로 했다. 삼십여명 참석자 중 산 위로 올라온 친구는 십여명에 불과하다. 초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산 위에 와서는 숨을 헐떡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진을 찍었던 곳, 도시락을 먹으며 즐거웠던 일 등을 왁자지껄 이야기가 많다. 제일 많이 나온 말은 왜이리 멀리 소풍을 왔느냐는 불평 소리와 산을 기어 오를 때 힘들어서 땀을 많이 흘렸다고 했다.

홈페이지에서는 경기옛길 유지관리를 위하여 시설물 모니터링 봉사단을 모집하였다. 참가 신청 후 지난 주에는 제6길 화성효행길을 3시간이나 걸었다. 다음 제7길은 독산성길이다. 옛 생각도 회상할 겸 버스를 타고 독산성 입구에 도착하였다. 시작 지점은 세마교이다. 황구지천 흐르는 지점에 다리가 놓여져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없던 다리이다. 산길로 들어선다. 처음으로 와 보는 오솔길이다. 곳곳에 삼남로라는 리본이 달려있다. 리본따라 걸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숲속을 나와 넓은 산책길이다. 길 옆에는 '숲속교실'이라는 안내판이 있으며 의자 배열이 야외 강의실이다. 학생들의 숲속 공부에 적합할 것 같았다.

사거리부터 꽤 가파른 언덕길이다. 언젠가 4륜 무쏘자동차를 운전하고 오른 기억이 난다. 한동안 걸어 올라가니 땀이 흐른다. 초등학교 소풍 때 보다는 오를만 했다. 성벽이 있고 암문이 앞을 막는다. 독산성 동문이다. 문을 통과하니 보적사 절이 있다. 옛날 소풍왔을 때는 기와집 한 채이었다. 셋 채의 건물로 탑도 세워져 있는 등 예뻐 보인다. 보석사 옆 둘레길은 공사를 하고 있다.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기사에서는 오산시에서는 중요 유적지로서 정비한다고 했다. 공사로 보적사 옆으로 걸으니 멀지않은 곳 산 위에 누각이 있었다. 洗馬坮(세마대)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이란다. 독서토론 회원들과 시를 낭독하기도 한 곳이다. 독산성 둘레길은 거의 산 정상에 있다. 한바퀴를 돌면 막힌데 없이 멀리까지 보이기 때문에 시원함을 느낀다. 누각에서 조금 내려오니 말을 씻었다는 세마대이다. 큰 나무가 있고 동탄 시내가 잘 보인다. 멀리 동탄에 있는 66층의 메타폴리스 주상복합아파트 4동이 보인다.

성벽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걷는 길은 성벽 위를 걷게 되어 있는데 안전시설도 없이 좀 위험하였다. 계단을 조심하라는 팻말이 놓여 있다. 길지않은 성벽은 남문에 이른다. 그 시절 자주 오르던 소풍길이다. 저 멀리 높지않은 산들이 보인다. 산 아래는 가장리, 가수리 마을이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옆이 오산초등학교이다. 그 때의 소풍길이 생각난다. 산을 오르내리며 걸어서 세마대 원족을 왔었다. 도시락 하나에 간식은 없던 시절이었다.

독산성 남문에 앉아있는 나를 뒤돌아 본다. 지금은 초등학생이 아니다. 회갑이 지나 칠십세 나이에 직장도 정년 퇴직하고 한가로이 고향을 쳐다보고 있다. 시인 천상병은 그의 시 '귀천'에서 삶을 소풍으로 비유했다고 한다. 칠십 고개에 입문한 나의 소풍길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아들, 딸 가정꾸리고 손주들 여럿이니 행복한 삶이라고 자평하며 살아도 되지않을까. 아내 옆에서 함께 의지하니 즐거운인생이라 웃음짖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歸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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